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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5일] 허드슨 강의 기적(US에어웨이스 1549편 불시착 사고)


영화 허드슨 강의 기적을 보셨나요??
허드슨 강의 기적 영화는 실화를 배경으로 제작된 영화입니다.

[불시착 직후 승객과 승무원이 비상 탈출하고 있는 모습]


US에어웨이스 1549편은 승객과 승무원 총 155명을 태우고 2009년 1월 15일 뉴욕 라과디아 공항을 출발하여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 더글러스 국제공항을 경유하여 워싱턴주 시애틀 터코마 공항으로 항해할 예정이었습니다.

이 비행기는 이륙직후 기러기떼와 충돌하여 버드스트라이크가 일어났고, 엔진에 불이 붙으면서 허드슨강에 불시착한 영화 입니다.

이 사고로 단 1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비행기 사고는 큰 인명피해로 이어지는데 엄청나게 안정적인 대처로 인해서
많은 목숨을 살렸습니다.

엄청난 기적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도데체 왜 그런지?? 얼마나 대단한건지?? 이런것은 잘 몰랐는데.
아래 영상 보니깐 정말 대단하네요.




또한 영화 안보셨다면 한번 보시는것 추천드리며,
유튜브 영상 링크 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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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의 업적 5가지


많은 독립의사 중에서도 김구선생은 그들의 정신적이자 실질적인 지도자였으며, 조국해방을 위한 동기의식을 심어주는 스승이면서도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1. 계몽운동 및 인재양성


- 일제 감정기때 한일합방의 소식이 전해지자 김구선생은 이를 반대하기 위하여 백성들에게 일제의 교육이 아닌 우리의 교육을 가르쳐 광복을 위한 신교육으로 지식이 있어야 나라가 강해진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2. 임시정부의 주석


- 광복군을 설치하여 많은 독립투사들에게 가장 인정받고, 영향력이 있었던 분이 김구선생이었다.



3. 을사조약 반대 상소운동


-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에 대해 김구 선생은 을사조약 폐기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을사조약 철폐를 위해 투쟁하였다.



4. 다양한 애국단체 설립


-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의 총재를 역임했고, 신한청년단을 조직하였으며,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윤봉길과 이봉창 의사 등의 독립의사를 파견하여 국민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습니다.



5. 신탁 통치 반대 운동


-  광복후 남한만의 단독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이상 백범 김구선생의 업적 5가지를 요약 해보았습니다.  이처럼 우리 나라를 위해 힘쓰신 백범 김구 선생님 뿐만 아니라 이봉창 의사,윤봉길 의사도 본받고 그 주위의 모든 애국심을 가진 백성들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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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암살사건(白凡金九暗殺事件)


6월26일은 백범김구 서거 71주년 입니다.
그래서 김구선생님의 암살사건을 알아 봤습니다.


● 정의 


1949년 6월 26일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서울 경교장에서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한 사건.


● 내용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백범 김구는, 해방 직후 중국에서 귀국하여 새로운 국가 건설에 앞장섰다. 특히 김구는 해방 이후 치열한 좌우대립의 과정에서 신탁통치 반대운동 등 우파의 정치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947년 말 남북 분단의 가능성이 커지면서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던 이승만과 결별하고, 중도파였던 김규식(金奎植)과 함께 ‘남북협상’ 등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결국 분단을 막는 데 실패한 김구는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고, 사실상 정계 2선으로 물러났다.
그러던 중 1949년 6월 26일 김구는 현역 육군 포병소위이자 김구가 이끌던 한국독립당(약칭 한독당) 당원이었던 안두희에게 숙소이자 집무공간이었던 서울 경교장에서 4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하였다. 김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여론은 깊은 애도를 표명하였다. 김구 암살 후 장례식까지 10일 간 다녀간 조문객은 약 120여 만 명으로 추산되었고, 건물 안에 들어오지 못한 문상객도 많았다. 장례식이 있던 7월 5일 서울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약 40∼50만의 인파가 몰려들었고, 다른 도시에서도 각각 수만 명씩이 모여 고인을 애도하였다.
사건 당시 정부와 군 당국은 이 사건을 한독당 내부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몰아갔다. 사건 직후 국방부는 안두희가 김구와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싸고 언쟁을 벌이다가 김구를 살해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시키고 한국독립당에 가입하게 했다는 혐의로 한국독립당 조직부장이자 광복군 지휘관이었던 김학규(金學奎)를 구속하였다.
7월 2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도 이 사건이 한국독립당의 내분으로 일어난 것이라는 내용의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 7월 20일 군 당국은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사건을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 한 친공산주의적인 한국독립당의 음모에 맞선 안두희의 ‘의거’라고 규정하였다. 안두희도 재판 중 2계급 특진을 하였고, 사건 1년여 만에 형 면제 처분을 받고 군에 복귀하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특혜를 받았다.
오랜 시간에 흘러 한국 사회 전반에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김구 암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의 목소리가 커졌다. 여기에 1992년 드디어 안두희의 육성 증언이 나왔다. 이에 국회는 1993년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약 2년간의 조사 후 위원회는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국회조사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이 보고서는 1995년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김구 암살사건은 당시 정부 발표처럼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싼 내분 과정에서 안두희가 개인적 차원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 면밀하게 준비·모의되고 조직적으로 역할이 분담된 정권 차원의 범죄 행위였음이 밝혀졌다.
먼저 암살범 안두희의 1차적 배후는 ‘군부’였다. 즉, 포병사령관으로 안두희의 직속상관이자 같은 서북청년단 출신인 장은산(張銀山)이 암살을 명령하였고, 사건 발생 이후 김창룡 특무대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으며 채병덕(蔡秉德) 총참모장, 전봉덕(田鳳德) 헌병 부사령관 등이 사후처리를 주도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 일본군, 만주군, 경찰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었다.
‘군부’와 더불어 안두희가 가담했던 ‘서북청년단’ 세력들도 이 사건에 깊이 관여하였다. 또한 보고서는 김구 암살사건의 배후와 관련해 가장 큰 쟁점이 되어 온 이승만 대통령의 관련 여부에 대해, 암살 사건 이후 안두희의 행적과 군부의 보호 조치가 이승만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하였고, 또 그가 이 사건에 대해 도덕적·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 사건에 사전 개입하거나 암살을 지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미국의 관련 여부에 대해서도 미국이 암살사건에 대해 상당한 정보와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암살사건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국회의 보고서 등 지금까지 이루어진 관련 조사와 연구를 종합해 보면, 먼저 김구 암살사건은, 김구가 친일청산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1949년 6월 전후에 일어난 국회프락치사건이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습격사건 등 정부 내 친일세력이 친일청산에 앞장선 반대세력을 물리적으로 탄압하고자 했던 일련의 사건들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김구가 정계에 복귀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에서, 정권 차원에서 가장 위협적인 정치적 경쟁자를 제거하는 동시에, 김구와 한국독립당까지 친공세력으로 몰아붙임으로써 정권의 기반인 극우반공체제를 강화하려 했던 조치였다고도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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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서거 11주기에 보는 노무현 재단 및 

근황이 궁금한 이명박 및 청계재단


5월 23일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 11주기를 맞는 날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업적 및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노무현 대통령의 명 연설은 얼마전에 블로그에 글을 올렸습니다

맨 밑 링크에 가시면 볼수 있습니다.


그럼 "사람이 먼저다!"라고 말씀하신 노무현 재단은 과연 어떤일을 하고,

어떻게 운영되는지 한번 알아 봤습니다.


그와 더불어 요즘 근황이 궁금한 이명박 대통령 청계재단도 도대체 뭐하는 곳인지 확인 해 봤습니다.


그럼 먼저 노무현 대통령의 노무현 재단부터 알아 보겠습니다.


노무현 재단 이사장인 유시민 이사장의 인사말입니다.



일단 취지는 노무현 대통령의 애도와추모의 시간을 발판삼아 노무현 정신을 확산하고, 더 나은 미래 희망의 씨앗을 심는 일로 채워 나간다고 합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노무현 정신 계승이 운영 방침이네요.


노무현 재단의 주 사업은


나눔사업


지역위원회 사업 및 회원 활동 지원


시민학교운영


시료편찬 및 연구, 출판 사업

기록을 가장 중요시 하셨던 분입니다.




추모 및 기념사업


노무현대통령 기념시설건립 및 추모기념 시설 운영


회원관리 및 서비스



이런 사업들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으며,


특히 시민학교 영역에 집중하고 있는듯 합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

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함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살아 생전에, 그리도 무덤에서도 깨어있는 시민의 힘을 강조하고

키워 나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런것들은 후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관심 있으신 분들은 후원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기부금 영수증까지 발행 되는것 같으니 연말정산에도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노무현재단 홈페이지 : www.knowhow.or.kr



그럼 요즘 근황이 궁금한 이명박 대통령 및 청계재단은 뭘 하고 있는지 확인 해 볼까요?


이런모습으로 깜빵으로 가신 이명박 대통령이 뭘 하고 있을까요?


얼마전까지 세금으로 잘 먹고 잘 살다가 보석으로 풀려 났네요.

콩밥을 더 먹어야 건강한데...


이명박 전대통령 근황

항소심에서 징역 17년을 선고받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법정에서 다시 구속된 지 6일 만에 석방

 

25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부장판사 정준영)는 구속집행 정지 결정을 내려 이날 이 전 대통령을 석방시켰다. 이 전 대통령 측이 보석취소 결정에 대해 재항고함에 따라 보석취소와 구속집행 정지상태

 

'국정농단' 사건으로 3년째 구속 수감 중인 박근혜 전 대통령

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17년 3월 구속된 뒤 4년여 동안 독방에서 지내며 총 형량 ‘징역 32년+α’ 재판을 받고 있다.







그럼 청계재단은 도대체 뭘 하는 곳일까요?

모든 재산을 다 환원 한다고 거창하게 말했던 청계재단...


공평한 교육의 기회를 모토로 운영을 한다고 했지만..


소외 계층도 돕고


장학금도 열심히 준다는 그곳...


그런데 실제는 이명박을 위한 재단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검색창에 청계재단만 검색해도 "청계재단 비리"가 먼저 검색됩니다.


그리고 구글에 검색을 해봐도....


첫 페이지 자체가 범죄 페이지 입니다.



구글의 이미지 검색결과도 마찬가지 입니다.


청계재단 홈페이지 : http://www.cheonggye.or.kr/


한마디씩 해 주시는것도 괜찮을듯 합니다.

좀더 분발 하라고..



살아온 길도 다르고, 살아가고 있는 길도 다른 두 대통령과 재단을 살펴 봤습니다.





2020/05/12 - [HISTORY/한국 역사] -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님의 서거11주기에 다시 보는 노무현 대통령님의 업적


2020/05/12 - [HISTORY/한국 역사] -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님의 서거11주기에 보는 명연설


2020/05/12 - [HISTORY/한국 역사] -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님 서거11주기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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