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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은 우리 정치사에 달변가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그의 명연설 중 10개를 모았습니다.

명장면, 명연설이 많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와 역사인식, 생각을 제대로 보여준 연설들입니다.

초선의원 시절부터 연이은 부산출마, 대통령 선거 시절과 대통령을 하면서 했던 연설들입니다.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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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 시절에도 언론사의 일방적인 비방, 거대 여당의 어마어마한 견제.

많은 업적과 성과를 만들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것들...

정말 너무나 노력하고 힘들어 하셨던 대통령입니다.


그 분의 업적에 대해서 알아 보고자 여기저기 많이 찾아봐서 올려 드립니다.



  [노무현 대통령님의 업적]

 

- 신용불량자 600만명 시대에 개인회생제도를 통해 임기 8개월만에 100만명을 회생시킨 

  최초의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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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 이행률 45%를 달성한 최초의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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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신용도 fitch사의 전망도를 A+를 달성한 최초의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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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51개월 연속흑자를 기록하며 500억불 수준에서 3200억불을 달성한 최초의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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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물가 상승률 평균 3.0%를 달성한 최초의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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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업체수를 20000개 에서 2000개 수준으로 급락 시킨 최초의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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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화 및 인터넷 보급 수준을 세계 1위 수준으로 발전 시킨 최초의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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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개발비 예산이 6조원 수준이던 것을 24조원수준으로 격상시킨 최초의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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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반시설 800개소에 불과하던 것을 1600개소로 확충시킨 최초의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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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주가지수 800대에서 1400대로 격상시킨 최초의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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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전체제조업체 현금보유비중을 6%대 에서 10%로 끌어올린 최초의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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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600억대 수준을 3200억불 으로 격상시킨 최초의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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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환자 건강보험 보장률을 40%대에서 70%로 격상시킨 최초의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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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로 어러운 국민들을 위해 외환보유액 500억불 수준에서 3200억불을 달성한 최초의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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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 보급률을 60%대 에서 105%로 격상시킨 최초의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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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지원예산을 1000억원 에서 10000억원으로 격상시킨 최초의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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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인적왕래수를 16000명에서 10만명으로 격상시킨 최초의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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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지출추이를 17%에서 27% 이상 격상시킨 최초의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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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특허출원 건수를 2900건에서 4600건으로 격상시킨 최초의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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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강국 2020 계획을 세워 전투력은 1.8향상시키고 , 인원은 50만명 수준으로 줄여 모 

  병제를 확립 하려던 최초의 대통령



[대통령특별교부금 (5년 총 6조 전부 사회 환원)]

노무현 대통령은 소위 통치자금이라고 하는 "대통령특별교부금"을 국가사업 필요한 행정기관에 내놓았습니다. 이 돈은 오로지 대통령 재량에 달려있는 자금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03 3 24일 행정자치부에 대한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특별교부금을 폐지해 보통교부금에 흡수하는 등 개선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노 대통령은 당시 "특별교부금은 원칙 없이 정치적 선심사업에 사용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특별교부금의 배분기준을 재검토해 자의적으로 사용될 여지가 없도록 개선하라"고 지시했다."

"노 대통령도 특별교부금이 권력층의 쌈짓돈처럼 사용돼 왔다는 문제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특별교부금 제도는 폐지되지 않고 규모와 운용방법 등만 조금씩 변해왔다. 20032004년에는 1조원이 넘던 특별교부금 규모가 2005년부터는 7000억원대로 축소됐고 사용용도도 재해대책비와 특정현안비로 단순화됐다.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특별교부금이 도로 개설 등 지역개발보다는 사회복지·문화사업에 집중 지원되도록 했고 심사와 사후관리도 강화했다."

결국, 그 돈은 2003년 태풍 매미 피해가 났을때 그 돈으로 복구사업비로 사용했답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자신은...단 한푼도 마음대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룩한 업적에 대해
이명박 정부 들어서 삭감한 사회복지 부문 예산 삭감내역

1.
사회적 일자리창출 지원금.... 325억원 삭감.
2.
장애아 무상보육 지원금.... 50억 삭감.
3.
보육시설 확충비용....104억원 삭감.
4.
청소년 안전시설 지원비.... 8천만원 삭감.
5.
장애인차량 지원비....116억원 삭감.
6.
건강보험 가입자지원금....568억원 삭감.
7.
학자금대출 신용보증기금 지원액....1천억원 삭감.
(
반값,학자금 대출 금리 인하 요구도 묵살)
8.
연탄보조금 삭감
9.
서울시 독거노인 주말,도시락 보조금 2억원 전액 삭감
10.
기초생활 보장 지원 대상자 월 수급비 36만원에서 9만원 삭감.

이와 반대로,
국부총리실 예산 중 총리 공관관리 비용 올해 7600만원 ▶
 5.5 배 늘어난 5억원 배정..
준법시위 정착예산이 560억에서 726억으로 29.6 %증액
(
특히 법질서 바로 세우기 운동 예산이 올해보다 4.7배 늘어난 31 8800만원으로 책정)

공안수사 예산 올해 29억원에서 384800만원으로 32.7% 급증..
방송통신위원회 바람직한 인터넷 이용환경 조성사업을 신설해 51억원의 예산 책정..
-
이용자 의식제고를 위한 홍보(15억원)..
-
인터넷 역기능 예방활동(18억원) 등이 포함..


참여정부 시절 국정홍보처 폐지를 주장해온 이명박 정부는 올해보다 국정홍보 예산을 60억원 증가
-
금융정책 알리기 명목으로 28000만원 책정..
-
노동현실 바로 알리기 명목으로 15000만원을 배정
-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및 후속조치 명목으로 37000만원의 예산을 책정..
-
초·중·고 일제고사 시험 결과에 대한 분석을 위해 17억원이 배정..


1. 정치/제도


1)
탈권위와 분권화


참여정부는 4대 권력기관장(국가정보원, 검찰청, 국세청, 경찰청)에 대해 대통령의 인사권을 제약하는 국회 인사청문회제도까지 도입하였다.

대 통령께서는 탈권력의 힘든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권력기관들을 앞세워 통치하면 반대세력들을 견제해 국정운영을 더 쉽고 편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민주주의 발전을 더 소중한 가치로 삼은 것이다. 특권을 스스로 버리고 권력기관들을 국민의 품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퇴임 후 1년도 못되어 권력기관들이 다시 통치 권력의 시녀로 복귀해버린 지금의 상황을 바라본 노대통령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2)
국가 기록관리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 국가기록관리의 허술함에 관한 보도를 보고 여러 가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행자부 장관에게 지시를 내렸었다.

당장 당시 구성 중이었던 정부혁신위원회에 기록관리 분야를 추가시켰다. 그 이후 정부는 기록관리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전문가들을 총체적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기록관리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스스로 '이지원' 시스템이라는 업무관리시스템을 개발했다는 점이다. 이 시스템은 특허청에서 특허를 받기도 했다.

모든 부처가 국가기록에 대한 시스템을 바꾸기 시작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이라는 법안을 제정했다. 그 이전까지 없었던 대통령 기록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한 법안이었다.

그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할 때쯤 일반 국민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기록을 남겼다.

하 지만 그는 대통령 기록을 남긴 업보로 후임 정권으로부터 엄청나게 시달려야 했다.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기록을 봉하 마을로 유출했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건국 이후 최대 국가기밀 유출이라고 떠들어댔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 열람권 확보를 위해 스스로 생산한 대통령기록 사본을 가져갈 수 있는지 행정안전부 및 법제처와 수없이 상의했다고 항변했다.

하 지만 이런 현실은 무시됐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대 수혜자였던 국가기록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 측근을 대통령기록 유출로 고발하는 사태로 비화되었다. 너무나 큰 애정을 가지고 키웠던 기관으로부터 고발당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너무나 억울한 마음을 홈페이지에 토로한 채 전체 기록을 국가기록원에 반납해야 했다. 하지만 상처는 깊었다.


수많은 기록관리 전문가들이 분노했다.



2.
경제

1)    지역발전

서울로의 집중을 탈피하여 지방 균현 발전을 위해 충남 연기군을 행정도시로 전환하고자 한것을 포함하여

주요 정부기관을 지방으로 분산하고자 했던 노력.

충 남 연기군 조치원역 앞에 설치된 시민분향소에는 노 대통령 서거 4일째를 맞은 26일에도 주민의 추모행렬이 끊이질 않았다. 이날 분향을 하기 위해 30분간 기다렸다는 임개응씨(53) "행정도시를 만들자고 한 게 다 나라 잘 되자고 한 것 아니냐" "그렇게 곧은 심지를 가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고 하니 억장이 무너진다"고 슬퍼했다.
특히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행정도시건설에 대한 주민 불신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행정도시건설을 진두지휘했던 노 전 대통령의 서거가 갖는 의미는 각별했다.
2)
부동산 문제
흔히 부동산 문제 만큼은 노무현 대통령의 대표적인 실패라고들 이야기한다. 물론 수요 조절 중심의 정책으로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던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러나, 노무현대통령만큼 부동산 문제가 한국사회에 미치는 해악을 깊이 인식하고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분투한 대통령은 없었다. 왜 노무현은 그토록 부동산 문제의 근본적 해결에 매진했을까? 그가 꿈꾸었던 '특권과 반칙이 없는 사회',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드는데 최대의 걸림돌이 한국사회에서는 바로 부동산-더 정확히는 토지-문제였기 때문이다.

참여정부가 부동산 문제의 해결 혹은 부동산 시장 정상화를 위해 추진했던 부동산 거래의 투명성 제고, 종합부동산세로 대표되는 부동산 세제 정상화, 개발이익 환수장치의 정비, 서민용 장기임대주택의 공급 확대 추진, LTV DTI로 상징되는 주택담보대출 관리 등의 정책들은 부동산 문제의 맥을 정확히 짚은 정책들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없었다면 추진되기 어려웠던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의 효과는 임기 말과 퇴임 후에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노 전 대통령 스스로도 부동산 광풍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밝혔지만, 그 정책 방향에 있어서는 옳았다.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대한민국 부동산 정책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하는 것이 정당하다.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역설적이게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퇴임 이후 서서히 빛을 발하고 있다.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조합이 주효해 부동산 버블이 더 커지지 않았고 부동산 시장이 연착륙할 수 있었다. 전 세계적 부동산 버블 붕괴사태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이 비교적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노 전 대통령의 공이다.

참 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은 노 전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여 기틀을 마련한 부동산 정책들이 'ABR(Anything But Roh)'을 모토로 내건 이명박 정부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참여정부 부동산 정책의 상징이라 할 종부세는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 조중동, 헌법재판소의 협업에 의해 말 그대로 형해화됐다. 양도세도, 개발이익환수장치도, 재건축 관련 시장정상화 조치들도, 주택담보대출관리도, 분양가 상한제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명박 정부는 단지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전면적으로 훼손한 데 그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부동산 정책의 기틀을 송두리째 파괴한 것이다.

2)    인기협은 구글코리아와 다음커뮤니케이션, 엔씨소프트, 옥션, SK커뮤니케이션즈, SK텔레콤, KT, NHN, G마켓 등 포털사이트들을 비롯한 150여개 국내 인터넷 관련 대표 기업들로 구성된 비영리 민간 경제 단체다.
이 어 인기협은 "노 전 대통령은 개방과 소통이라는 인터넷의 정신을 몸소 실천해 인터넷 대통령으로 불리울 만큼 인터넷을 인터넷답게 만들었다" "한국 인터넷과 정보통신 산업의 진흥에 기울인 관심과 노력에 힘입어 국민과 기업인들이 세계 어느 나라에도 부럽지 않은 디지털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고인의 공을 기렸다.
인기협은 또 "고인이 누리꾼들에게 쏟은 애정과 인터넷 업계에 보내준 격려를 가슴 깊이 간직해 인터넷산업 발전과 인터넷 문화창달을 위해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기협은 마지막으로 "우리의 존경과 사랑의 끈이 그곳에도 닿기를 바라며 부디 편히 쉬시길 바란다"고 적었다.

3.
외교/안보

1) 한미간 동맹

"노무현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만난 수십 명의 정상 중 가장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반미 발언으로 미국을 당혹시켰다.
그러나 한.미 동맹에 대한 그의 기여는 (친미 대통령이었던) 전두환.노태우 이상이다. 그가 퇴임하는 2008 2월 현재 한.미 동맹은 훨씬 강하고 좋아졌다."


2)
남북한 화해


햇 볕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을 통해서 6.15 공동선언과 10.4 공동선언으로 상징되는 남북화해협력, 양국 정상 만남, 남북총리급 회담 정착, 이산가족상봉, 개성공단 등의 업적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물론 지금은 이러한 모든것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지만.

3) 자주적 독립


한나라당은 여전히 반대 또는 연기 의견을 제시하고 있지만

독립된 국가로서 미국으로부터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가져온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중요한 업적이다.

4)
국방력 증대

햇볕정책과 군사력 증강은 별개의 문제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주장했고 전지작전통제권 환수 및 조기경보기 4대 도입확정, F15K 60대 도입 확정, 이지스함 역시 3척 도입, 제주도 해군기지군함건설도 확정했다. 또한 크루주 순항미사일 개발, 장사정포 파괴용 무인 폭격기 개발도 지시하였다.


5)
이라크 파병 및 한미 FTA 협상

   "제가 이라크 파병을 강하게 반대했는데, 그때 언론에서 청와대 내부에서도 반발이 있다고 시끄러웠거든요그런데 파병을 공개적으로 반대한 저한테 나중에 고맙다고 노무현 대통령께서 격려금까지 주셨어요. 상황에 밀려 파병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반대 의견을 공개적으로 내준 제게 고마우셨던 거죠."
-
박주현 변호사

 


4.
인권존중


1)
인권위원회, 과거사 진상조사단


노무현 대통령 조문을 온 아주머니께서 울음을 터뜨리면서 노무현 대통령이 너무 고맙다는 것입니다.
몇십년동안 아주머니의 친오빠의 생사를 몰랐다고 하십니다.그런데 노무현 대통령께서 과거사 진상규명을 하면서아주머니의 오빠께서 실미도 부대원이어었다는것을 알게되었답니다. 가족의 소식을 알게해줘서 너무도 고맙다고 하십니다.



2)
서민 존중, 인권변호사, 서민을 위한 대통령

원진레이온 산업재해 피해자 40여명.

노 전 대통령은 국회의원 시절인 1988년부터 원진레이온의 이황화탄소 등 유독가스 피해 진상조사반을 구성하는 등 투쟁에 앞장 서 1993년 정부로부터 정식 직업병으로 인정 받는데 기여했다.

"
노 전 대통령은 당시 독가스로 가득 찬 작업장에 직접 와준 유일한 분이었다"면서 "퇴임 직전에도 우리를 청와대로 불러 불편한 건 없는지 챙겨 주셨다"



5.
민주주의 등

1) 참여 민주주의

- 인터넷을 통한 개방과 소통 확산


- 퇴임 후 민주주의 2.0




2)
부정부패

잘 알다시피 노무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깨끗한 대통령이 되기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내가 국세청장이 되고 나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1급 세 자리 인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생전에 처음 받아보는 대통령의 전화였다대통령께서 대뜸 말씀하셨다.
L
씨를 차장으로 임명한다고 하는 데 로비나 부탁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청탁인사하면 안 됩니다
.

저는 누구의 인사 부탁도 듣지 않습니다.
허허, 그래요. 알았습니다.
청와대가 인사부탁을 하면 아무리 소신 있는 기관장도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국세청장 재임 2년 동안 대통령으로부터 단 1건의 인사 관여도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믿어줄까? 그러나 엄연한 사실이다."
- 전임 국세청장 이용섭





3)
지역간 이기주의 타파

그는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쉬운 곳을 버리고 고집스럽게 부산을 선택했다. 이곳에서 연거푸 떨어진 이유는 순전히 김대중이 이끄는 호남당 후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바보 노무현은 정면으로 항변했다.
"도대체 호남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그리 잘못했습니까? 왜 전라도 사람은 항상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합니까?"

영남선거에서 호남편견에 맞서 이처럼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맞선 정치인이 누가 있었는가?



4) 권위주의 타파


대통령 권위주의 등 과거 정치의 권위의식 타파 노력서민대통령



하늘나라에는 부디 행복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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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님 서거일(이명박에게 보낸 편지 전문)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님이 서거하신 날입니다.

대한민국이 충격에 빠진날이며, 대통령을 지지했던 많은 분들이 어마어마한

분노와 슬픔을 느꼈던 날입니다.


여기서 노무현 대통령님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전문을 다시 한번 읽어 봤습니다.


편지를 쓰신 노무현 대통령님의 많은 감정의 억누름이 보입니다.


한번 보시죠.








이명박 대통령님,
기록 사본은 돌려드리겠습니다.


사리를 가지고 다투어 보고 싶었습니다.
법리를 가지고 다투어 볼 여지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열람권을 보장 받기 위하여 협상이라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버티었습니다.

모두 나의 지시로 비롯된 일이니 설사 법적 절차에 들어가더라도 내가 감당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퇴직한 비서관, 행정관 7-8명을 고발하겠다고 하는 마당이니 내가 어떻게 더 버티겠습니까?
내 지시를 따랐던, 힘없는 사람들이 어떤 고초를 당할지 알 수 없는 마당이니 더 버틸 수가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모두 내가 지시해서 생겨난 일입니다. 나에게 책임을 묻되, 힘없는 실무자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일은 없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록은 국가기록원에 돌려 드리겠습니다.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는 문화 하나만큼은 전통을 확실히 세우겠다.”
이명박 대통령 스스로 먼저 꺼낸 말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한 끝에 답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한 번도 아니고 만날 때마다, 전화할 때마다 거듭 다짐으로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에는 자존심이 좀 상하기도 했으나 진심으로 받아들이면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은근히 기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말씀을 믿고 저번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보도를 보고 비로소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때도 전직 대통령 문화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부속실장을 통해 연락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처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연락이 없어서 다시 전화를 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몇 차례를 미루고 미루고 하더니 결국 ‘담당 수석이 설명 드릴 것이다’라는 부속실장의 전갈만 받았습니다.
우리 쪽 수석비서관을 했던 사람이 담당 수석과 여러 차례 통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역시 통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내가 처한 상황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전직 대통령은 내가 잘 모시겠다.”
이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한 만큼, 지금의 궁색한 내 처지가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내가 오해한 것 같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을 오해해도 크게 오해한 것 같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가다듬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록은 돌려 드리겠습니다.
가지러 오겠다고 하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보내 달라고 하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통령기록관장과 상의할 일이나 그 사람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국가기록원장은 스스로 아무런 결정을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결정을 못하는 수준이 아니라, 본 것도 보았다고 말하지 못하고, 해 놓은 말도 뒤집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상의 드리는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기록을 보고 싶을 때마다 전직 대통령이 천리길을 달려 국가기록원으로 가야 합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정보화 시대에 맞는 열람의 방법입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전직 대통령 문화에 맞는 방법입니까?
이명박 대통령은 앞으로 그렇게 하실 것입니까?
적절한 서비스가 될 때까지 기록 사본을 내가 가지고 있으면 정말 큰일이 나는 것 맞습니까?

지금 대통령 기록관에는 서비스 준비가 잘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까?
언제 쯤 서비스가 될 것인지 한 번 확인해 보셨습니까?

내가 볼 수 있게 되어 있는 나의 국정 기록을 내가 보는 것이 왜 그렇게 못마땅한 것입니까?

공작에는 밝으나 정치를 모르는 참모들이 쓴 정치 소설은 전혀 근거 없는 공상소설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기록에 달려 있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우리 경제가 진짜 위기라는 글들은 읽고 계신지요? 참여정부 시절의 경제를 ‘파탄’이라고 하던 사람들이 지금 이 위기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지금은 대통령의 참모들이 전직 대통령과 정치 게임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두려운 마음으로 이 싸움에서 물러섭니다.

하느님께서 큰 지혜를 내리시기를 기원합니다.


2008년 7월 16일

16대 대통령 노 무 현


참 많은것들을 돌아보시면서 쓰셨고, 많은 생각을 하시면서 편지를 쓰셨을거라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정치와 국민의식을 한단계 높인 노무현 대통령님을 추모하면서 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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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8일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담은 책


출처 : https://univ20.com/


참 많은 생각을 한 책입니다.

이 책을 읽고 감정이 이입되서 많은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정말 이토록 가슴아프게 책을 읽은적이 있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정말 꼭 한번 읽어보세요.




작가 한강은 소설 『소년이 온다』를 통해 그 상처를 다시 응시하고 애도하기로 합니다. 총 6장으로 구성된 소설은 소년 동호를 중심으로,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던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았어요.

 

작가는 소설을 쓰며 “벌 받는 기분으로 책상에 앉아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비슷한 심정으로 책장을 넘겨야 할 겁니다. 곪아 썩어가는 상처를 다시 들여다볼 용기를 내기가 쉽지 않겠지만, 함께 기억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1. 소년,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다

1장은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소년, 동호의 이야기입니다. 한집에 사는 동호와 정대는 같은 중학교에 다니는 친구예요. (정대, 정미 남매는 동호의 집에 세 들어 살고 있습니다) 그 일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늘어지게 낮잠을 잔 뒤 마당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을 겁니다.

 

소년들은 잘 몰랐습니다. 왜 군인들이 사람들을 때리고 죽이는지. 그저 정미 누나가 없어져서, 누나를 찾으러 거리로 나와 있었을 뿐이에요. 어른들이 데모하는데 근처는 가지도 말라고, 간밤에도 역에서 총을 쏴서 사람이 죽었다고 했지만, 자신들이 죽게 될지는 정말 몰랐습니다. 뭘 했다고요.

 

 

그런데 정대가 죽었습니다. 갑자기 울린 총소리에 놀라 거리가 아수라장이 되었을 때. 동호는 정신없이 도망가다 정대 손을 놓쳤어요. 총알이 정대의 옆구리를 내려쳤고, 정대는 헝겁 인형처럼 고꾸라졌습니다. 그런 친구를 뒤로하고 동호는 도망쳤습니다. 겁에 질려서 저격수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이 어디일까 만을 생각하며 집으로 갔어요.

 

집에 도착해 불 꺼진 정대 방을 보자, 소년은 그제야 총에 맞아 죽은 친구를 떠올립니다. 동호는 복받쳐 올라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해요.

 

 


“지금 정미 누나가 갑자기 대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달려나가 무릎을 꿇을 텐데. 같이 도청 앞으로 가서 정대를 찾자고 할 텐데. 그러고도 네가 친구냐.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야. 정미 누나가 때리는 대로 얻어맞을 텐데. 얻어맞으면서 용서를 빌 텐데.”

『소년이 온다』 36p


 

 

정대가 죽던 날. 어린 소년의 영혼은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소년은 친구를 찾으러, 시신들이 모여 있는 도청으로 갑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그곳에 남아 잔일을 돕게 됐어요.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처럼 친구나 가족을 찾으러 온 사람들에게, 덮어둔 천을 열어 죽은 몸을 보여주고, 신원을 확인하는 일이에요.

 

시체 냄새가 가득한 도청에서, 오열하는 유족들을 보며 동호는 다짐합니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2. “누가 나를 죽였을까, 왜 죽였을까.”

2장의 화자는 죽은 정대의 영혼입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피를 많이 흘려 습자지 같이 얇고 투명해진 자신의 얼굴이 보였답니다. 썩어가는 수많은 몸들 사이에서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니 무서웠지만, 정대는 어디로도 갈 수 없었어요. 눈을 감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죠. 혼이란 그저 썩어가는 자신의 몸뚱아리 주변을 맴돌 수 밖에 없다는 걸 정대는 깨닫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죽인 사람의 꿈에 나타나고 싶다고.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자신의 눈을 봤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혼엔 힘이 없죠. 키가 자라고 싶었던, 팔굽혀펴기를 마흔 번 연달아 하고 싶었던, 언젠간 여자를 안아보고 싶었던, 중학교 3학년 꼬마 정대의 삶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습니다.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중략)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듯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을 생각해.”

『소년이 온다』 57p


3. “오늘 남는 사람들은 정말 다 죽어요?”

다시 동호가 있는 도청으로 돌아옵시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계엄군이 오늘 밤에 도청으로 들어올 것이고, 남은 사람들을 다 죽일 거래요. 형들은 각오가 된 사람만 남고 다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동호는 가지 않았어요. 엄마가 도청까지 와서 여기 있다간 죽는다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끝까지 남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죽은 정대를 위해서? 어쩌면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아님 죽는 게 두렵지 않다는 초연한 확신으로? 아마 아닐 겁니다. 창문 틈 아래 웅크려 앉아 배가 고프다고 말하던 아이가, 회의실에서 남은 카스텔라를 얼른 가져와 먹어도 되냐고 묻던 아이가, 죽음에 대해서 뭘 알고 그런 선택을 했겠어요.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소년이 온다』 114p


 

 

그들이 무슨 마음으로 도청에 남았건, 계엄군은 예정대로 도청으로 들어왔고 시민군은 철저하게 패배했습니다. 총을 들고 경계하던 형들은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 속에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어요.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대요. 진압 과정에서 군인들은 항복하는 아이들까지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동호는 죽었습니다.

 


4. 그날 이후, “살아남았다는 치욕과 매일 싸웁니다”

소설의 3장부터는 동호가 죽고 시민군이 계엄군에게 패배한 이후에, 살아남은 사람들의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그들은 ‘극렬분자’, ‘빨갱이’라는 딱지를 달고 연행되어 끔찍한 고문을 받아요.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 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년이 온다』 167p

 

“내가 어떻게 대답하든 소총의 개머리판이 얼굴을 향해 날아왔습니다. 본능적으로 나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벽 쪽으로 뒷걸음질쳤습니다. 내가 쓰러지면 그들은 등과 허리를 밟았습니다. 숨이 끊어질 것 같아 내가 몸을 뒤집으면 군화로 정강이를 짓이겼습니다.”

『소년이 온다』 106p


 

 

끔찍한 고문을 받던 이들은 이듬해 성탄절 특사로 석방됩니다.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고통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십 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고통은 끝나긴 커녕 선명해집니다. 자신을 괴롭힌 이들을 죽을 때 꼭 데려 가겠다며 분노하는 사람, 트라우마에 미쳐서 손목을 여섯 번이나 그은 사람, 살아남았다는 것에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까지. 모두가 하나같이 지옥에 살고 있어요. 그들에게 광주는 지나간 일이 아닌 겁니다. 비록 더 이상 누구도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리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하루하루의 불면과 악몽, 하루하루의 진통제와 수면유도제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젊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누구도 우리를 위해 염려하거나 눈물 흘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자신조차 우리를 경멸했습니다.”

『소년이 온다』 126p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소년이 온다』 135p


5. 내 친구, 우리 형, 우리 엄마의 이야기

사실 5월 광주에 대한 소설이라면 이미 나올 만큼 나와 있습니다. 『소년이 온다』가 특별한 건 등장인물들이 마치 내 가족, 친구인 것처럼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이에요. 사건을 고발하는데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상처를 안고 사는 개개인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서술 방식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들을 잃은 엄마의 독백인 6장을 읽을 땐, 저도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마지막 날에 내가 너를 찾아갔을 적에, 네가 그리 순하게 저녁에 들어갈라요, 말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으까이. 나는 안심을 하고 집에 가서 느이 아부지한테 그랬어야.
여섯시에 문 잠그고 집에 온다요. 다 같이 저녁 묵자고 약속했소.
그란디 일곱시가 되도록 네가 안 들어온게. 그렇게 너를 영영 잃어버렸다이.”

『소년이 온다』 185p


 

어떤 독자들이 『소년이 온다』를 읽었으면 좋겠냐는 물음에 한강 작가는 “젊은 독자, 어린 독자들이 많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답했습니다. 광주가 이제 점점 언급이 안 되고 있고, 교과서에도 자세한 정황이 나오지 않고 교육이 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모두가 모르게 된다는 거에요.

 

 

얼마 전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발포 명령을 부인하며 “사실 ‘광주사태’하고 나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잊은 사이, 광주는 여러 번 되태어나 살해당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저도 오랫동안 광주를 잊고 지냈습니다. 여러 번 책을 덮고 눈물을 닦아야 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이제라도 읽게 되어, 기억하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소년이 온다』 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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