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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의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 중 두 번째 프로젝트 '한산: 용의 출현'이 캐스팅을 확정하고 촬영에 돌입 한다고 합니다.

2014년 7월 30일 개봉해 1761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대한민국 역대 박스오피스 신기록을 수립한 '명량'의 후속 작품입니다.

캐스팅은 박해일(이순신 역), 변요한(와키자카 역), 안성기(어영담 역), 손현주(원균 역), 김성규(준사 역), 김성균(가토 역), 김향기(정보름 역), 옥택연(임준영 역), 공명(이억기 역), 박지환(나대용 역), 조재윤(마나베 역)까지 다양한 세대의 배우들 중 완벽한 적임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한산: 용의 출현' 촬영에 이어 하반기 '노량'(가제)까지 김한민 감독은 이순신 장군의 해전을 완성, 개봉할 예정이며. '한산: 용의 출현'은 5월 18일 크랭크 인, 2021년 여름 개봉 예정입니다.

영화 제작 순서와 실제 전투가 발생한 시점은 맞지 않는것 같네요.

1 - 명량 - 2014년 - 1597년

2 -  한산 - 2020년 - 1592년

3 - 노량 - 2021년 - 1598년

한산대첩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학익진일것 같습니다.

지형을 이용한 전략인데 정말 멋지네요.

그럼 한산도 대첩은 정확하게 어떤 역사적인 전쟁인지 알아 보겠습니다.


1. 개요

임진왜란 중 벌어졌던 이순신의 승전 중 하나로 행주대첩진주대첩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알려져 있다. 이 한산해전의 승리로 인해 평양까지 진격한 고니시는 추가 보급 및 병력 지원이 없어 더이상 나아가지 못했고, 왜군의 수륙병진을 완전히 박살낸 대첩이다. 여담으로 당시에는 한산도 해전이 아니라 견내량 해전으로 많이 불렸다.


2. 한산도 대첩의 배경

선조 25년(1592), 5월과 6월 사이 2차 출동을 통해 전라 좌수사 이순신의 함대를 주축으로 한 조선 수군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로 이어지는 일본의 육군 수송 부대와 수군을 상대로 일방적인 토벌전에서 승리하게 된다.
이에 해안의 수군 부대가 조선 수군에 의해 동쪽으로 밀려나가는 것을 염려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6월 23일자 명령을 통해 용인에서 육군과 호응하던 수군 부대인 와키자카 야스하루 다시 해안으로 급파하고, 오다 노부나가 시절부터 수군의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구키 요시타카 그 외 가토 요시아키 등 3인을 소집하여 잔존 수군과 규합하여 조선 수군을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조선 수군은 8월 12일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더불어 경상 우수사 원균의 함대 등 총 55척이 노량에서 합세하게 된다.


3. 전투 전개

6월 14일 일본 수군은 구키 요시타카 중심으로 부산포에 집결했지만 이미 용인 전투에서 조선군이 약체임을 증명한 와키자카는 7월 7일, 자신의 함대만을 이끌고 거제도로 단독 출격을 개시했다. 그 날 저녁 무렵에 왜선 70여척이 견내량에 머무르고 있다는 첩보를 확인한 조선 수군은 8일 한산도 근해에서 이를 확인했다.
왜군의 세력은 대선이 36척, 중선이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으로 구성된 함대였다. 이전의 해전처럼 항구에 정박한 왜군 함대를 포위 섬멸하는 형태로 전투를 치르기엔 견내량 주변이 협소하고 암초가 많은데다 조류의 흐름도 역류여서 판옥선이 서로 부딪힐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함대 간의 전면전이 불가피하자 조선군은 한산도 근해에서 적들을 유인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대여섯 척으로 구성된 소규모 함대를 미끼조로 투입하여 일본 수군을 전체를 건져내는 유인책을 시작으로 작전을 시작했다. 식견이 있는 지휘관이라면 당연히 매복을 의심할 상황이었지만, 와키자카가 이미 휘하의 1500명으로 조선군 5만을 격퇴한 용인 전투를 경험하여 조선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했으므로, 왜군 함대는 손쉽게 조선 수군이 던진 미끼를 물었다. 조선군의 퇴각을 확인하자 와키자카는 한산도 연안의 다도해 내로 거침없이 함대를 몰았고, 퇴각하는 척하던 이순신의 함대는 해협을 지나 복병을 배치해둔 작전수역에 진입했다. 와키자카의 함대가 들어서자 한산도 좌우의 섬에서 기다리던 전선들은 3개 부대로 나뉘어 학익진을 형성, 일본 수군을 포위한 뒤 십자포화로 공격했다.

때마침 역방향으로 해류가 바뀌었고, 조선 수군은 이에 총통과 화전을 쏘며 전진했다. 전 방향에서 날아드는 탄망에 주력선인 세키부네(關船, 관선)는 물론이고 일본군 내 주요 가신들이 탄 아타케부네(安宅船, 안택선)까지 줄줄이 격침되고, 일본군은 제대로 된 반격 한번 하지 못하고 마흔 척이 넘는 군함을 잃었다. 심지어 지휘관인 와키자카 본인도 지휘선을 관통한 화살에 맞아 부상당했다. 이후 그는 속도가 빠른 다른 관선을 타고 김해로 빠져나가 목숨을 건진다. 와키자카의 잔존 부대는 200-400여 명 정도가 한산도에 배를 내버려둔 채 인근의 무인도로 도망쳤으며, 대선 1척, 중선 7척, 소선 6척 등은 멀리서 해전을 관망하다가 일본군의 주요 부대가 모두 격침당하자 방향을 바꾸고 김해로 후퇴했다.


4. 한산도 대첩의 결과

말도 안되는 참패를 겪은 일본군은 이틀 뒤인 16일 안골포 해전에서 뒤따라 출격한 구키 요시타카 함대까지 각개격파를 당하게 되며, 거의 100여척에 달하는 대함대가 고작 3일만에 수장당하는 치명타를 입는다.

이에 더 이상 해상 전투에서 큰 의미를 두기 힘든 것을 알아차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해전 대신 해안선 방어를 하라는 뜻에서 '해전 금지령'을 선포하면서 사실상 남해의 제해권을 조선 수군이 되찾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로 인해 조선의 서해를 통한 수륙병진이라는 목표가 좌절됨과 더불어 이순신 함대의 4차 출동에는 조선과 일본을 이어주는 일본의 본진 부산까지 습격당한다. 이렇게 일본군이 해상 요격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명나라의 남하와 더불어 일본의 임진왜란의 큰 패인이 된다. 애초 계획이었던 육군과 수군이 같이 진격한다는 수륙병진전략이 깨진 것이다.


이번에도 멋진 영화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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