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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구 선생님과 윤봉길 의사]


1932년 4월 29일은 오전 9시 30분 부터 군사퍼레이드를 시작으로 일제 승전기념식 행사가 훙커우 공원에서 있었습니다.

11시 30분경 상하이를 침략한 일본 장군들과 대표가 올라와 "기미가요"를 부르는 순간

굉음과 함께 폭탄이 터졌습니다.


[윤봉길 의사]


윤봉길 의사의 이 의거로 일본 총사령관 및 단장등 많은 일본군들이 죽거나 다치고 후휴증으로 죽었습니다.


이 의거로 1932년 4월 29일, 오후 1시경에 전 세계에 뉴스로 보도되기 시작하여, 전 세계 각국 주요 신문들이 제1 면에 대대적으로 이를 보도하면서 세계을 깜짝 놀라게 했다.

처음 보도되었을 당시에는 대부분 중국인이 일으킨 항일투쟁 내지는 일본인 혁명주의자 활동으로 인식되었으나 이튿날에 한국청년 윤봉길의 항일 독립운동이 밝혀지고 보도되었다.

이 의거로, 만보산 사건으로 인해 나빠진 한국과 중국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어 중국 영토 안에서 한국 독립운동의 여건이 좋아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또한, 당시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제스는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에서의 폭탄 투척 소식을 전해 듣고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

라며 감탄하였다. 이 일은 장제스가 조선에 관심을 갖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정말 대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포스팅 합니다.


윤봉길 의사는 대한민국 예산군 덕산면에서 1908년 6월 21일에 태어났습니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를 입학하였으나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 받은 윤봉길의사는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며 학교를 자퇴하였습니다.


청년시절 농민 운동이 관심이 많았으며 여러가지 책을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1930년에는 독립운동을 위해 아래의 글귀를 남기고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1931년 김구선생님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온몸을 바칠 각오를 하고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한인애국단 선서문]


[한인애국단 사진]


김구 선생님은 일본군 열병식에 폭탄을 투하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윤봉길 의사와 함께 거사를 계획한다.


4월 29일 아침식사를 마치고 의거를 위해 홍커우 공원으로 향합니다.

홍커우 공원에 도착한 윤봉길 의사는 11시 30분경 일본 헌병 경계선을 뚫고 단상 5M 전방까지 도착하여 정확하게 폭탄들 던집니다.

의거가 끝난후 윤봉길 의사는 현장에서 검거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 돌아가십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 총 사령관(12번 다리 수술 후 사망)

가와바타 사타쓰구 - 폭탄을 맞아 창자가 끊어져 사망

시게미쓰 마모루 - 오른쪽 다리 부러져 평생 절름발이

무라이 - 폭탄맞고 중상

노무라 기치사부로 - 오늘쪽 눈 실명

후에다 켄키치 - 다리 절단

토모노 - 폭탄 맞고 중상


정말 대단합니다.


욘봉길 의사는 이 의거로 사형을 선고 받고 1932년 12월 19일 사형을 당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데로 독립운동의 기초가 되었으며,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4월 29일은 대한민국에 가장 용감한 역사를 가지고 있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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